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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고대사

남북국의 정립 (2)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의 일부는 통일신라로 흡수되었다. 하지만 상당수는 고구려의 고토에 남아 당나라에 대항하여 항쟁하였다.
안시성, 요동성, 신성 등은 고구려 유민이 많아 저항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신라의 통일전쟁 당시 검모잠과 안승의 고구려 재건과, 요동지방에 남아있었던 보장왕이 말갈족을 규합하여 일으킨 난이다.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내지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쳤고, 이 때, 많은 유민들이 신라나 동만주로 도피하였다.
고구려의 장군 출신이었던 대중상(大仲象)은 이 시기 요서지방의 영주(營州)로 강제 이주당한다. 당나라에는 이 시기 측천무후가 집권하여 거란족 억압정책을 펴고 있었다. 696년 거란족의 이진충이 이에 항거하여 영주 도독 조홰(趙翽)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 틈을 타서 대중상과 말갈족 족장 걸사비우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한다.
측천무후는 이들을 회유하려고 진국공과 허국공의 벼슬을 내렸으나 실패하고, 진압군을 보내 거란족의 반란을 평정한 뒤, 이진충의 양자인 이해고를 필두로 추격해온다. 걸사비우는 이해고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대중상도 이 와중에 병사하지만 대중상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유민들과 말갈족을 다시 규합해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를 격파한다. 당나라는 더이상 이들을 추격할 의지를 상실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당의 북방을 위협하던 돌궐이 당의 영향하에 있던 거란을 규합하여, 당의 병력은 분산된다. 698년, 대조영은 동모산에서 국가의 성립을 선포하고 국호를 대진국으로 정한다.

구당서(발해말갈전)의 기록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조영은 가속을 이끌고 영주(營州)로 옮겨 가 살았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696~697)에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니, 조영이 말갈의 걸사비우와 함께 각각 동쪽으로 망명해 요새지를 차지하고 수비를 굳혔다. 진충이 죽자 측천이 우옥금위대장군 이해고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 남은 무리를 토벌케 하니, 먼저 걸사비우를 무찔러 베고 또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조영을 바짝 뒤쫓았다. 조영이 고구려 말갈의 무리를 연합해 해고에게 항거하자, 왕의 군대가 크게 패했으며 해고는 탈출해 돌아왔다. 이 때 마침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에게 항복했으므로 길이 막혀서 측천도 그들을 토벌할 수 없게 되자, 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으로 가서 읍루부(涓婁部)의 옛 땅을 차지하고는 동모산(東牟山)에 웅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조영은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용병을 잘 했으므로 말갈과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신당서(말갈전)의 기록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속된 자니, 성은 대씨(大氏)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의 동모산을 거점으로 했다. 그곳은 영주에서 동으로 2000리 밖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맞닿아 니하(泥河)로 경계를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닿았고 서쪽은 거란이다. 여기에다 성곽을 쌓고 사니 고구려의 망명자들이 점점 몰려들었다. 만세통천 연간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 거란의 관직명)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남은 종족과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서 태백산의 동북을 거점으로 해서 읍루하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고 수비를 굳혔다. 무후가 걸사비우를 책봉해 허국공(許國公)을 삼고 걸걸중상으로 진국공(震國公)을 삼아 죄를 용서했다. 그러나 비우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무후가 옥금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를 시켜 쳐 죽였다. 이때 중상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조영이 패잔병을 이끌고 도망쳐 달아났다. 해고가 끝까지 추격해 천문령을 넘었는데, 조영이 고구려와 말갈병을 거느려 해고에게 저항하니 해고가 패전하고 돌아왔다. 이때 거란이 돌궐에 붙으므로 왕의 군대가 길이 끊겨서 그들을 치지 못하게 됐다. 조영은 곧 비우의 무리를 합병해 지역이 중국과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를 진국왕이라 부르며 돌궐에 사자를 보내 통교했다.

삼국유사의 기록

삼국사에서 말하기를, 의봉 3년(678) 고종 현술에 고려의 남은 세력들이 서로 모여 북쪽의 태백산 아래 의지하였다.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개원 20년(732) 경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토벌하였다. 또한 성덕왕 32년(733) 현종 갑술,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범하였다. 이에 현종이 토벌하였다. 신라고기에 말하기를 고려의 옛 장수 조영은 대씨이다. 남은 병사들을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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