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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고대사

비담의 난

진흥왕(534~576)은 7세에 즉위하나, 재위 37년만에 43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 후 왕위는 차남인 진지왕에게 갔다가, 그가 4년만에 죽자, 장손인 진평왕에게로 간다. 진평왕은 579년부터 632년까지 무려 54년간 재위한다. 632년부터 647년까지 재위한 선덕여왕에게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할머니(嫗姥)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선덕여왕의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녀가 진평왕의 무남 장녀임을 고려하면, 왕위를 이을 당시 적어도 4~50대의 나이였음이 분명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 선덕왕편에는 다음과 같은 저자의 논설이 있다.

논하여 말하길, 듣기로 중국의 전설에 여와씨라는 여신이 있지만 이는 천자가 아니고 신농복희씨를 도와 구주를 다스렸을 뿐이다. 한나라의 여치와 당나라의 무조는 어리고 약한 임금을 휘둘러 나라를 다스렸으나, 사서에서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고황후 여씨", "측천황후 무씨"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천지의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데, 어찌 할머니들이 안방을 나와서 국가의 정사를 단행하겠는가. 신라가 여자를 왕위에 추대하여 앉힌 것은 정말 난세의 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서경에 "암탉이 운다." 고 했고, 역경에 "암퇘지가 껑충껑충한다." 고 하였으니 이를 경계해야 한다.


유교사상에 심취했던 김부식의 시각으로는 여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부정적이었던 것인데,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려고 하였는지, 신라의 세 여왕이 즉위하는 해에는 항상 반란의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에는 총 3명의 여왕이 있다. 그 처음은 선덕여왕이고, 그 뒤를 이은 진덕여왕, 그리고 하대의 진성여왕이다. 선덕여왕이 즉위하는 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진평왕 53년 여름 5월에 이찬 칠숙이 아찬 석품과 함께 모반하니, 왕이 미리 알고 칠숙을 잡아내어 동시에서 목을 베고 아울러 구족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의 국경까지 갔다가 처자가 보고싶어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총산으로 되돌아와 한 나무꾼을 만났는데, 옷을 벗어 나무꾼의 헌옷과 바꿔입은 뒤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잡혀서 사형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칠숙/석품의 난이다. 하지만 이 둘의 모반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당하였으므로, 난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반란모의, 혹은 반란도모 라고 해야 옳다.

진덕여왕이 즉위하는 해에는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 반란을 일으킨다. 바로, 비담의 난이다.

선덕왕 16년 봄 정월에 비담, 염종 등은 여왕이 정치를 다스리지 못한다 하여 모반하고 병력을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8일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선덕이라 하였다...
...진덕왕 원년 정월 17일에 비담을 죽이고 연루자 30명을 죽였다.


비담은 선덕왕 15년에 상대등에 오른 귀족이다. 이 사건은 신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에 반발한 귀족들의 저항이었으며, 난을 진압한 김유신과 김춘추 일파의 세력은 막강해진다.

진성여왕이 즉위하는 해에도 난의 기록이 있다.

정강왕 2년 봄 정월, 한주의 이찬 김요가 반하므로 군사를 일으켜 잡아 죽였다.


한주는 한강유역을 일컫음이며, 불과 몇년 뒤에 기훤, 양길이 일어나고 궁예가 태봉국을 세우는 지역이다.

김부식이 이러한 난들을 하나씩 기록한 이유는, 단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그의 여왕에 대한 적개심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비담의 난은 단지 여왕에 대한 남성의 저항이라고 보기에는 복잡한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상대의 신라는 왕정이라기보다는 귀족정에 가까웠다. 진한을 계승한 신라는 초기에는 6성 귀족들의 연합으로, 박씨, 김씨, 석씨가 번갈아가면서 왕이 되었다. 356년 내물마립간대에 이르러 신라는 김씨의 세습을 시작하는데, 이때만 해도 왕권이 매우 약했다. 503년 지증왕대에 이르러 비로소 왕(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514년 즉위한 그의 아들인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다. 이를 이어받은 진흥왕은 정복군주로 신라의 영토를 엄청나게 확장한다. 왕의 호칭을 사용한지 불과 150년만에, 신라 귀족들은 국가의 지도자에서, 왕의 일개 신하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무열왕 김춘추로부터 시작하는 신라의 중대는 흔히 '전제왕권'이라고 표현된다. 신라는 귀족정에서 왕정(제정)으로 나아갔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즉위하던 시기는 바로 이러한 왕권강화가 한참 진행되던 중이었다. 특히 선덕여왕은 기존의 세력이 아닌 가야계의 김유신과, 성골이 아닌 김춘추와 손을 잡고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였는데, 귀족들은 이에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귀족의 대표인 상대등 비담이 중심이 되어 사상 초유 규모의 반란이 일어난다. 영향력 있는 30명 이상의 귀족이 참여하였다니 그 규모는 대단했을 것이다. 선덕여왕이 난중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아마도 병사일 것으로 추측되지만, 난의 영향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진덕여왕은 역시 김유신과 김춘추와 함께 이 난을 진압한다. 그리고 수십명에 달하는 귀족들이 반란의 죄로 숙청당한다. 신라의 중앙집권화 정책은 점점 가속화되어간다.

역사학자들은 진덕여왕이 죽고, 무열왕이 즉위하는 654년부터의 신라를 '전제왕권국가'로 부른다. 무열왕 김춘추는 국가의 기틀을 갖춘 왕에게 선사하는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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