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럽사

예나 전투 (Battle of Jena)

예나(Jena) 전투, 혹은 예나-아우어슈테트(Jena-Auerstedt) 전투 라고 한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당시의 프랑스 제1제국) 군이 독일(당시의 프로이센, 프러시아) 군을 격파한 결정적 전투이다.
1805년,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프랑스 제국군에 패배하여 붕괴한다.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라인동맹이 맺어진 덕분에 프랑스의 영향력은 독일 중부까지 미치게 된다. 이에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게 된 프로이센은 위기를 느끼고, 국내의 반 나폴레옹 세력들에 힘입어, 1806년, 영국, 러시아, 스웨덴 등과 함께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한다.
전쟁은 프로이센이 라인연방에 주둔한 프랑스 군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시작된다. 프랑스는 이 요구를 묵살했고, 프로이센 군은 15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라인연방 내의 프랑스군들을 각개격파 할 계획을 수립한다.
하지만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작전수행은 매우 늦어졌고, 프랑스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20만 병력을 집결시켜서 거꾸로 프로이센군을 공격한다. 전투는 프랑스군의 대승으로 이어지고, 도주하는 병사들을 추격하면서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의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한다. 이어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의 수도인 베를린까지 점령하여 입성하게 된다. 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쾨니히스부르크까지 도망가서 러시아의 도움을 받는 신세가 된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프로이센의 제 5대 왕으로, 프로이센의 전성기였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의 차차기 왕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계몽주의에 입각해 많은 개혁정책을 폈고, 짧은 시간 내에 상비군을 증원시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7년 전쟁, 폴란드 분할 등으로 영토를 크게 넓혔다. 프로이센 군은 제도 개혁과 국제 정세 속에서 패배를 모르는 군대로 이름이 알려진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의 사후, 20년동안 프로이센 군은 이러한 성과에 안주하고 만다. 예나전투 당시 총 사령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최선임장교 부라운슈바이크 공작 사이에 지휘권이 규정되어 있지 않아 지휘계통이 혼란스러웠을 뿐 아니라, 통신 및 전령도 철저하지 못했다. 군사편성 및 전투 교범은 7년 전쟁 당시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하니, 전술의 천재인 나폴레옹이 개혁한 프랑스군과 비교가 될 수 없었다. 마센바흐나 샤른호르스트와 같은 군 개혁가들이 꾸준히 군 개혁을 주창하였으나 이들은 소수파에 불과했다. 과거의 승리는 오히려 군 관련자들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그 실패를 교훈삼아서 다른 노력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거꾸로 한번 성공한 사람은 그 성공에 안주하여 새로운 시도나 도약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에 있어서 그 시간은 20년일 수 있지만, 개인에게 그 시간은 훨씬 더 짧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