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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고대사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무리한 민족사관 오마이뉴스에 뜬 기사를 보다가 조금 우려스러워서 글을 쓰게 되었다. 기사의 요지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신라를 높이기 위해서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연대를 늦추어 잡았다는 것. 기사를 읽어보면 정말 가관이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조금 늦게 건국되었는데, 김부식이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200년정도 늦추려고 고구려 왕계를 축소하고, 조작하여 신라보다 건국 연대를 늦추었으며, 백제 역시 덩달에 건국 연대가 늦추어졌다는 것. 제목은 백제로 뽑았으나 백제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삼국사기의 "백제가 고구려 건국보다 조금 뒤에 건국되었다" 라는 기록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끌어올리면 백제의 건국연대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아주 단순한 논리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건국연대만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1. .. 더보기
비담의 난 진흥왕(534~576)은 7세에 즉위하나, 재위 37년만에 43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 후 왕위는 차남인 진지왕에게 갔다가, 그가 4년만에 죽자, 장손인 진평왕에게로 간다. 진평왕은 579년부터 632년까지 무려 54년간 재위한다. 632년부터 647년까지 재위한 선덕여왕에게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할머니(嫗姥)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선덕여왕의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녀가 진평왕의 무남 장녀임을 고려하면, 왕위를 이을 당시 적어도 4~50대의 나이였음이 분명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 선덕왕편에는 다음과 같은 저자의 논설이 있다. 논하여 말하길, 듣기로 중국의 전설에 여와씨라는 여신이 있지만 이는 천자가 아니고 신농복희씨를 도와 구주를 다스렸을 뿐이다. 한나라의 여치와 당나라의 무조는 .. 더보기
남북국의 정립 (2)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의 일부는 통일신라로 흡수되었다. 하지만 상당수는 고구려의 고토에 남아 당나라에 대항하여 항쟁하였다. 안시성, 요동성, 신성 등은 고구려 유민이 많아 저항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신라의 통일전쟁 당시 검모잠과 안승의 고구려 재건과, 요동지방에 남아있었던 보장왕이 말갈족을 규합하여 일으킨 난이다.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내지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쳤고, 이 때, 많은 유민들이 신라나 동만주로 도피하였다. 고구려의 장군 출신이었던 대중상(大仲象)은 이 시기 요서지방의 영주(營州)로 강제 이주당한다. 당나라에는 이 시기 측천무후가 집권하여 거란족 억압정책을 펴고 있었다. 696년 거란족의 이진충이 이에 항거하여 영주 도독 조홰(趙翽)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키는데.. 더보기
남북국의 정립 (1) 남북국이라는 단어는 한국사에서 근래에 사용되기 시작한 말이다. 이전에는 통일신라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해왔는데, 발해가 한국사의 강역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이를 대체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한국사에서의 남북국의 시기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를 한국사로 볼 것이냐는 강역의 문제가 선결되어야 한다. 삼한의 영역인 한반도와, 예맥의 영역인 만주에는 거의 항상 다른 왕조가 존속되어왔다. 만주에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있는 동안 한반도에는 진(辰)이 성장하였고, 한사군이 설치되고 부여가 성장하는 동안 남쪽에는 진한, 변한, 마한의 삼한이 존속했다. 고구려가 한사군을 축출하고 성장하는 동안에는 삼한이 백제, 신라, 가야로 변하였고, 신라가 삼한을 통일한 이후에는 고구려를 발해가 대체하였다. 후삼국시.. 더보기
삼한의 통일 (3) 백제가 멸망하고 난 뒤, 신라는 당의 대고구려 전쟁을 도우라는 압력을 받게 된다. 당은 신라의 무열왕이 죽어서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군사파견을 요청한다. 백제를 멸망시킬 때 당의 도움을 받았던 신라는 어쩔 수 없이 김유신을 필두로 한 지원군을 보낸다. 그동안 수와 당의 침략을 잘 막아내었던 고구려도 이번엔 위태로웠다. 연개소문은 쿠테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꼭두각시로 세운 뒤, 대당강경정책을 고수한다. 그는 당의 침략을 잘 막아내지만, 그의 사후 네 아들들은 내분을 일으키며, 당은 이틈을 타 고구려를 침공하여 수도를 함락하고 보장왕을 사로잡는다. 대제국 고구려의 허망한 마지막이었다. 당과 신라의 완충이던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과 신라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당은 백제를.. 더보기
삼한의 통일 (2) 가야 연맹을 해체/합병한 신라의 힘은 나날이 커져간다. 파죽지세의 신라를 백제는 제어하지 못한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국운을 건 침략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한수 유역을 차지한 것은 신라에게 행운이었다. 수나라는 곧 고구려 침략 실패의 후유증으로 당나라로 교체된다. 신라는 한수 유역을 통해 당나라와 직접 교류하기 시작한다. 신라와 당나라는 무열왕의 대에 이르러, 나당동맹을 맺게 된다. 백제와 고구려는 여제동맹으로 이에 맞선다. 국사책에는 동서로 나당동맹, 남북으로 여제동맹 + 돌궐, 왜 로 묘사되는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지형 변화이다. 신라 무열왕은 외교의 달인이었다. 그는 여제동맹으로 신라가 위태로워진 선덕왕 시절, 당나라에 가서 태종 이세민에게 눈물로 호소하여 동맹을 이뤄낸다. 덕분에 고구려는.. 더보기
삼한의 통일 (1) 삼한(三韓)은 본디 고조선시대부터 존재한 남쪽의 연맹국가 진(辰)에서 갈라져 나온 무수한 소국들을 일컫는 말이다. 한수(지금의 한강) 이남에는 마한(馬韓, 후에 백제로 발전), 진한(辰韓, 후에 신라로 발전), 변한(弁韓, 후에 가야로 발전)이 있었으며, 이들은 북쪽 혹은 해상에서 넘어온 유이민의 세력들에 의해 차츰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발전해나간다. 한수 유역에 위치한 백제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삼한에, 정치적인 변동이 크게 일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장수왕대에 시작된 남진정책부터였다. 고구려는 광대토대왕때부터 강성해진 군사력을 남쪽으로 쏟아서, 백제의 수도가 위치한 한수 유역을 장악하였으며, 백제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맺고(이것이 유명한 나제동맹이다), 가야도 끌어들인 삼국동맹군으로 고구려.. 더보기